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해태 타이거즈 (문단 편집) ==== [[한국프로야구/1999년|1999년]] ==== [[IMF]] 후폭풍으로 해태그룹은 점점 [[장비를 정지합니다|망조를 타고]] 있었고, 해태제과의 경영난이 악화되면서 팀의 재정난을 해결하기 위해 1998 시즌 후 타이거즈는 주력 선수들을 [[장사하자|현금 트레이드]]하는 사태에까지 이르렀다. 이때 팔려갔던 대표적인 선수가 바로 [[임창용]]. 대가로 [[삼성 라이온즈]]에서 [[양준혁]], [[황두성]], [[곽채진]] 등등을 얻어오긴 했다.[* 임창용에 앞서 삼성은 위에 서술한 것 처럼 조계현을 이미 4억 원에 사갔었다. 비슷한 시기에 삼성은 이순철, 정회열을 영입했는데 이쪽은 해태에서 방출된 것을 영입한 것이다.] 하지만 이들도 임창용의 구멍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역시 마무리투수와 중심타자의 가치 차이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압도적인 마무리투수는 1994, 97년의 [[이종범]]급이 아닌 이상 아무리 뛰어난 타자라도 극복할 수 없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었다. 양준혁은 1년간 32홈런, 21도루를 기록하며 괜찮게 활약했지만 곽채진은 임창용만큼 뛰어난 성적을 거두지 못했고[* 그래도 삼성에 있을 때는 전천후 투수였다.], 황두성은 아예 1군에서 10경기도 뛰지 못하고 [[2000년]] 시즌 후 [[방출]]되었다. 그리고 그는 현대로 들어가 현대의 마지막 세이브 투수가 된다.] 그나마 [[쌍방울 레이더스|쌍방울]]보다는 사정이 나았다. 쌍방울의 상황은 이보다 더더욱 비참했다. 해태는 이종범과 선동열의 이적료&임대료를 매년 수십억씩 받기라도 했지 쌍방울은 이런 것도 없었다.... 하지만 양준혁을 데려옴으로서 1999년은 해태 왕조의 마지막 불꽃을 발하듯 엄청난 '''화력을 뿜을 수 있었'''다. 극단적인 [[타고투저]] 시즌이었던 1999년, 해태 타선은 왕조의 [[회광반조|마지막 불꽃]]을 발하듯 핵방망이를 연신 터뜨려댔다. 종범이가 도루하고 1점 올리던 그런 득점력에 평균득점력 +1 을 달고 살았다고 생각하면 쉽다. 도루를 굳이 안해도 홈런이 매일 터져주니.. 양준혁의 가세에, 기존의 [[홍현우]], [[장성호]]가 커리어하이를 기록했으며 [[트레이시 샌더스]], [[스토니 브릭스]] 두 용병 또한 출중한 장타력을 가지고 있었다. 양준혁이라는 핵우산 효과가 엄청났다.[* 양준혁이 떠난 이듬해 해태는 이호준을 SK로 보내고 홍현우마저 길고긴 하락세를 타기 시작하면서 절반도 안되는 86홈런을 기록한다. 파크 팩터상 광주가 잠실보다 홈런이 잘나오는 구장이므로 해태 입장에선 매우 쪽팔린 기록이다.] 샌더스의 40홈런은 2009년 [[김상현(1980)|김상현]]도 넘지 못한 역대 타이거즈 최다 홈런 기록이다.[* 샌더스는 당시 40홈런, 94타점 .247/.408/.575를 기록했다. 타율만 가지면 공갈포지만 이해 출루율이 타율 2위(.349)의 이병규를 능가할 정도로 좋았다. 하지만 101개의 볼넷 뒤에는 133개의 삼진 또한 있었다. 즉 이 선수는 홈런/볼넷/삼진 3개중 하나였던 독특한 선수였다. 그 뒤를 이은 진정한 [[톰 퀸란|선수]]가 등장한다.] 그해 팀 홈런 개수만 210개를 기록하며 당시 한 시즌 최다 팀 홈런 기록을 갈아치웠고 이 기록은 [[이마양]]으로 대표되는 2003년 삼성이 213개로 갈아치운다. 허나 몇몇 포지션에 생긴 구멍과 붕괴한 투수진 문제로 승률은 .457(전체 7위)에 그쳤다. 시즌 보정을 하지 않으면 2017년에 이어 역대 타이거즈 2위의 타선이었다.[* 보정을 하면 리그에서 더 상대 우위를 보인 시즌 여러 개에 밀린다. 그래도 팀 역사상 상위권 타선은 맞다.] 한 경기 3홈런은 무려 24회를 기록했으며 4 홈런 이상 경기도 8번이었다. 4게임 중 1게임은 3홈런 이상 경기였으며, 10득점도 우습게 해댔다. 광주구장에 심심할 때마다 A를 새길 정도로.[* 한 이닝에 10득점 이상을 기록할 때, 당시 전광판들은 이닝별 점수를 한 자릿수밖에 표시하지 못하는 성능 때문에 9를 넘어서면 10=A, 11=B 등으로 숫자를 알파벳으로 표기했다.] 1999년이 아무리 타고투저의 시즌이었어도 해태의 210홈런은 대단한 기록이다. 1999년 해태는 팀 홈런 말고도 프로 야구에 여러 가지 기록을 세웠다. 팀 최다 홈런(210)[* 4년 후에 [[이승엽]]이 56홈런을 친 삼성이 깼다.], 팀 최다 득점[* 2000년 현대가 깼다.], 그리고 순득점(득점-실점)이 많은 팀 중 최초의 7위 달성. 구장 문제에 관해 덧붙이자면 해태 타선은 '''잠실 19경기에서 23홈런'''을 쳤다.[* 그 요인에는 괴물이었던 [[트레이시 샌더스]]의 활약이 컸다. 잠실에서만 무려 9개의 홈런을 치며([[이승엽]]이 1999년 잠실에서 4개 2003년 2개를 쳤다는 것을 기억하자. 물론 이승엽이 잠실에서 잘했던 적도 있었다 1998년에는 무려 8개, 2002년에는 7개를 쳤었다. 하지만 샌더스에게는 안됐다.) 진정한 파워히터의 홈런은 구장이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줬다. 하지만 [[홍현우]]와 [[양준혁]]도 잠실에서 많은 홈런을 기록했으며, 홈런과는 관계없는 [[최해식]]이나 [[박계원]]도 잠실에서 홈런을 기록할 만큼 이팀은 이해에 홈런에서만큼은 복이 있었다.][* 그와 반대로 해태의 2연속 우승이었던 1996,97년에는 [[OB 베어스]]를 상대로 잠실에서 단 한개의 홈런도 기록하지 못하면서 피홈런만 15개를 기록했다. 잠실이 아무리 넓다 해도 18경기에서 홈런을 단 한 개도 치지 못한 것 또한 진기록이다. 반면 [[LG 트윈스]]상대로는 1997년에만 9경기에서 7개의 홈런을 치긴 했다.] 이 수치를 가지고 만약 이해 해태가 잠실을 홈으로 쓰는 구단이었다면? 산술적으로지만 '''잠실에서만 92개'''의 홈런을 기록했다는 기록이 나오며[* 이것은 다른 잠실 팀 원정 경기까지 합산이다.] 원정 경기까지 감안하면 210홈런까진 아니어도 190 홈런 정도는 충분히 기록했다는 계산이 나온다. 이렇게 리그 1위를 다투는 핵타선을 가지고도 7위밖에 하지 못한 이유는, 전년도 핵심 투수 4명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 공백을 나머지 투수들이 메울 수 없었고 [[답이 없는 한화의 수비|답이 없는 해태의 수비진]]이 되어버려서 수습이 안 되었던 것이다. 우선 선발 에이스 역할을 하던 [[이대진]]이 그동안의 누적된 관리 부실로 인해 결국 부상으로 누웠다. [[이강철]]은 10년 동안 정말 잘 던져줬으니 그만큼 피로도 많이 쌓였고 시즌을 통째로 쉬게 되었다. 3선발 젊은 피로 주목받던 [[김상진(1977)|김상진]]마저 청천벽력 같은 [[위암]] 말기 진단을 받았고, 결국 이듬해인 1999년에 시즌 도중 향년 22세로 세상을 등지고 말았다. 뒷문을 잠그던 진정한 핵심 투수 [[임창용]]은 30억 원에 [[삼성 라이온즈|삼성]]에 팔려가고 말았다. 결국 전년의 핵심 투수 4명이 이대진의 1경기 말고는 아예 등판하지도 못하게 된 것이다. 실질적으로는 샌더스 양준혁 홍현우의 100홈런보다 더 많은 승수를 올려주던 투수들이 누워버렸다. 이건 지금 어느 팀이 와도 어떻게 해 볼 수 없게 되어버렸다. 그렇다고 투수가 리그 최하위냐 하면 그건 아니고 8구단 6위정도는 했다. 더 못 던진 팀은 LG와 쌍방울이다. 투수들을 이닝별로 살펴보면 22살의 신예급 유동훈이 155.1 이닝[* 개인 경력 최다 이닝.]을 던지며 ERA 4.75를 기록해 리그 평균보다 좀 더 좋은 결과를 만들었다. 사실상 에이스로 활약한 [[곽현희]]는 팀 최다 승인 11승을 기록했지만 '''평균 자책점은 무려 6.15'''이나 되었다.[* 근 20년이 흘러 [[유희관]]이 6점대 10승 투수가 된다.] 오철민 최상덕 박진철도 리그 평균보다 조금 못한 수준으로 이닝을 채워갔다.[* 최상덕은 이미 1995년도에 부상이 있어서 1997년도 까지 제대로 못 뛰었다가 1998년도 서서히 회복하였다.] 쌍방울에서 온 오봉옥이 3점대 초반으로 잘 던져줘서 그나마 위안이 되었던 시즌이다. 까치 김정수의 해태 마지막 시즌이었고 이때도 구원으로 곧잘 했다. 수비진도 영 아니었다. 타이거즈 역사상 손꼽히는 수비수 '''[[김종국(야구)|김종국]]'''은 부상으로 단 3경기만 출장했으며[* 그 빈 2루수 자리는 '''[[홍현우]]'''가 채우게 된다.] 그 수비 안 좋은 [[장성호]]는 '''좌익수''', '''1루수'''를 떠돌아다녔고 때에 따라서는 '''[[중견수]]'''로도 나왔다. 삼성을 떠나기 싫어했지만 어디서든 최선을 다했던 [[양준혁]]은 [[지명타자]]와 [[1루수]]로 주로 나왔으며 [[이호준]]도 그 전해 지명타자에서 3루수~1루수를 전전하였다. 그나마 고졸 1차지명으로 '''[[정성훈]]'''이 입단해서 3루를 봐준 게 다행이었다. 당시 [[외국인 선수|용병 제도]] 도입 초창기상 비슷한 팀이 많았지만 해태는 유독 타력이 좋아도 떠도는 선수가 많았다.[* 현재 그러한 기조는 [[두산 베어스]]가 뒤를 잇는다. 이쪽은 정반대로 기본적으로 수비 좋은 선수를 뽑고 쓴다는 기조 때문에 수비가 안되는 선수는 어떻게든 경기에 나오기 위해 1루, 좌익 등의 포지션으로의 전향을 활발히 하고, 거기서도 낙제점 판정을 받으면 1군에 올라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다름 아닌 김재환이 그런 케이스의 전형으로, 15년도까진 타격도 타격이지만 포수, 1루수로서의 수비력이 1군급에 아예 못 미치는 수준이었기에 2군 선수에 그쳤지만 그나마 좌익수로서 자리를 잡으면서 주전으로 도약할 수 있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